2012년 5월 28일 월요일

남자의 물건 - 김정운을 읽고.



 요새 잘 나가는 김정운 교수. 여기저기 나오셔서 주로 하는 얘기의 뼈대는 대충 이거다. 요새 한국 남자들은 위기다. 왜? 자기 삶이 없기 때문이다. 이 얘기를 자기 전공인 심리학적인 근거로 잘 설명해서 인기다. 책도 잘 팔린다. 노는 만큼 성공한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두 권도 베스트 셀러였고, 제일 신간인 이 남자의 물건도 내자마자 베스트 셀러로 등극했다. 

재밌다. 구성이 두 파트로 나뉘는데, 초반에는 각종 컬럼들을 모아놨고, 후반에는 여러 유명한 남자들과의 인터뷰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이미 컬럼들은 거의 다 읽어봐서 후반의 인터뷰 부분이 더 재미있었다. 인터뷰를 그 남자의 인생을 한 마디로 설명해주는 물건들을 하나씩 정해서 진행하는데 이런 식이다. 긍정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조영남에게는 자신의 컴플렉스인 외모를 가려주는 두꺼운 안경이, 변절자라고 손가락질 받는 김문수에게는 자기의 선택을 정당화시켜줄 수 있는 기록을 담은 수첩이 그 남자의 인생의 물건이다. 

갑자기 내 인생의 물건은 무엇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별로 물욕이 없는 편이라, 옷 모으는 데도 관심이 없고, 차 모으는 데도 관심이 없다. 글씨를 못써서 문구류에도 별 무관심이다. 아, 나에게도 내 인생의 물건이 있다. 이어폰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어폰만은 사정이 허락하는 한 제일 좋은 걸 쓸라고 노력해왔다. 지금 쓰는 이어폰도 Shure 535 모델이다. 


요렇게 생긴넘인데, 결혼 전에 무려 60만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샀다. 2년 째인데 지금 전선 피복이 살짝 까져서 바꿔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중이다. 

어찌보면 이어폰 만큼 자기만족만을 위한 제품이 있을까 싶다. 이어폰 자랑할 일 거의 없다. 자랑이라는 게 보통 남들이 어, 그거 특이한데 뭐죠? 라고 물어봐야 되는 건데 이어폰 끼고 다니다가 그런 일은 왠만하면 없다. 먼저 나서서 이거 60만원짜리인데 죽여줘요 한 번 들어보세요 하긴 좀 뭐하다. 오디오처럼 거대한 위풍이 있는 것도 아니다. 모른 척 집에 놀러오라고 한 뒤 은근슬쩍 자랑할 수도 없는 일이다. 

노래도 나만 듣는다. 남들에게 같이 듣자고 하기엔 착용법이 고약하다. 나름 하이엔드라고 착용법이 특이해서 귀 뒤로 감아 올린뒤 귀에 꽂아 듣기에, 같이 들을라면 먼저 착용법부터 설명해줘야하는 귀찮음이 있다. 그것도 매우 친한 친구일 때 얘기지, 귀지 가득한 이어폰을 나눠끼기란 설익은 사이에서는 별로 추천받을 행동이 아니다. 

결국, 남이 안 알아줘도 되니 나 혼자 좋자고 지르는 것이 이어폰인 셈이다. 그리고 그게 내 인생의 일면을 투영하고 있다.  안정된 직장을 뛰어나와 하고 싶은 거 해보겠다고 질러본 객기엔 아마도 이어폰에 60만원을 썼던 그 때와 같은 맥락이 있다. 남들이 다 왜 그러냐고 걱정스럽게 보는데, 설명하기도 어렵다. 걍 결국 나 좋자고 한 일이고, 나에게만 가치가 있는 결정이었다. 

Shure 이어폰을 썼던 지난 2년간 나는 고등학교 이후로 가장 많이 음악을 들었던 것 같다. 대학교 이후로 한동안 음악을 잘 안 들었는데, 이어폰을 써 볼라고 일부러라도 음악을 많이 들었다. 그리고 인생이 꽤나 행복했다. 객기로 지른 내 인생도, 아마 나중에 돌아보면 행복하리란 기대를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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